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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나씨

@moonassi / moonassi.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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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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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권태에 대해 누가 알아줄까. 권태에는 게으를 태怠자가 있으니 배부른 소리라 욕먹기 딱 좋다. 사람들이 권태를 잊기 위해 하는 일들이란... 오락, 창작, 관계 맺기, 여행, 자기기만... 다 망각을 위한 행위들이 아닐까... 권태는 게으름에서 오는게 맞다. 더 많은 변화와 가능성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일이다. 변화와 가능성은 도처에 있으니까... 다른 일이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아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지.’ 라고 한발 물러설 마음이 있지만, 권태에 대해서는 ‘야, 너는 암 것도 몰라 이 자식아'라고 꼰대같이 소리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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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중에서도 가장 못된 교육은, ‘착하고 올바른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강박을 심어주는 교육이 아닐까. 사람이 살며 ‘올바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까. 이왕 교육이란 것이 필요하다면, ‘착한'사람이 되기위한 훈육과 더불어 ‘올바른 나쁜 사람 되기’에 대한 교육도 시켜주는 건 어떨까. 하지만 그런 것은 불가능하겠지. ‘착한 나쁜사람’은 형용모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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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방랑이란 가능할까. 목적지 없이 떠돌 수 있을 만큼 내가 강건할까. 집이 없어 끊임없이 신세 지고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을 과연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권태는 목적지 없이 계속해서 떠나는 것만으로 극복될 수 있을까.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처분하고도 허무를 느끼지 않을 만큼 방랑은 좋은 것일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서는... 방랑은 가능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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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 혹은 매너리즘

더위를 먹었는지 목줄에 메인 개마냥 멍하니 하루를 보냈다. 샤워만 다섯 번.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얼음만 찾아 마시니 식도가 얼얼해지며 헛구역질이 나왔다. 아침부터 벽에 큰 종이 한 장을 붙여놓았다. 당장 그려야 할 그림이 있다. 밑그림도 다 있으나, 도무지 시작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더위는 핑계일 뿐, 그리기가 싫었다. 그리기 싫다는 느낌이 든 것은 아마도 처음일까. 하고 싶은 것이 일이 되면 하기 싫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상업적인 요청에 의한 그림을 그릴 때도 일이라 느꼈던 적 없었는데 이제 제법 일처럼 느껴진다. 다 돈 때문이다. 올해는 그림을 꽤 팔았다. 왜냐하면, 올해부터 팔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할인도 해주고, 묶음으로 팔기도 하고,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붙잡고 적극적으로 팔았다. 그걸로 상반기를 먹고 살았다. 그토록 오래전부터 바라던 삶이, 그림으로 먹고사는 삶이 가능한 일임을 확인한 터라 기쁘기도 하고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갔던 것도 사실이다.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목돈'이라는 걸 꿈꿔보기도 했다. 하지만 번 만큼 (기다렸다는 듯) 나갈 곳도 점점 많아지기만 하더라.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게 아니라 십 년간 정성을 다해 숙성시킨 와인을 쏟아붓는 느낌. 맥이 빠진다. '목돈'이라는 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더 약아빠지고 얼마나 더 절실하게 매달려야 할지는 눈에 보이지만, 그렇게 인생을 허비하기는 싫다. 그리고 싶은 그림보다 그려야 할 그림이 점점 더 많아진다. 어쩌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없는 것일까. 창작 의욕을 잃어버리고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매너리즘이라면 매너리즘이 맞고, 발전이 없는 것이 슬럼프라면 슬럼프가 맞겠다. 무엇이 되었건 멈추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구상하고 그리는 일이 아니라 돈벌이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오늘도 전시장에서 소개받은 웬 사모님께 연락이 와, 어떤 그림을 사겠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어떻게 하면 그림을 팔 수 있을지 짧은 순간에 재빨리 궁리하는 나를 보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그림을 팔아서 무얼 하겠다는 건지... 막상 그림을 팔고, 환산된 금액을 손에 쥐고 나면, 그 그림을 그린 것이 마치 (수중에서 금방 사라지고 말) 돈을 위해 그린 것처럼 느껴져 어쩐지 기운이 빠져버린다. 그림은 갖고 있어도 불안하지 않지만, 계좌에 들어와 있는 환산된 금액은 늘 불안하게 한다. 그림은 두고 있으면 사라지지 않지만, 돈은 금방 사라져버린다. 월급을 받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나에게 큰 의미가 없는 노동력의 댓가로 받은 돈은, 먹고 마시는데에 써도 아깝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이 아닐까) 하지만, 그림을 팔아서 번 돈은 다르다.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 더 큰 이윤을 얻기 위해 걷어내야 할 쓸데없는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생산한 가치를 팔아 생긴 이득은, 더 큰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만 쓰면 좋겠다. 아무튼, 올 여름은 정말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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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칠일 토요일

아침부터 볕이 좋은 날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아 책상 앞에 한참 앉아 있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구상한다는 핑계로 소파에 드러누워 두 시간을 보냈다. 고개를 뒤로 젖혀 창밖을 내다보니 다섯 시가 돼가는데도 해거름이 아직 멀었다. 해가 정말 길어졌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태양 빛에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커다란 지구의 모습을 상상한다. 내가 사는 이곳은 이내 태양 반대편 어둠 속으로 감춰질 것이다.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태양계 전체의 거대한 회전 운동을 떠올려 본다. 그 장엄한 움직임을 몸으로 직접 체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슬프게 느껴진다. 그것을 매 순간 느낄 수 있다면, 인간은 다만 지구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붙어 살아 가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처럼 다음 주까지해야 할 일 때문에 고민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창밖에 느린 걸음으로 볼거리를 찾아 헤매는 수많은 행락객도,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도 부질없는 존재로 느껴져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잠이 이마에서 코를 타고 솔솔 내려온다. 리오타르니 발터벤야민이니 유명 철학자의 말을 빌려 기획된 전시에 그림을 출품하기로 했다.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거절하지 못해서 해야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며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전시-라고 요약하면 될까... 아무튼 그런 내용의 전시란다. 사랑이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한 어느 먼 나라 철학자의 자기연민에 찬 생각들이 어느 날 최신 철학으로 소개되어 번역되고 이 나라 젊은 독자들의 손에까지 들려 읽히게 된 것이리라. 그래 맞는 이야기다- 공감하여 이렇게 전시로 기획된다. 한 철학자의 주관이 책으로 만들어져 이 사람 저 사람의 정신을 매개로 흐르고 흘러 나에게까지 당도하는 그 모든 과정을 상상해보면 그 또한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느낌이다. 졸음을 이겨내려고 나오니 광장에는 오월의 맑고 깨끗한 풍경을 배경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커다란 조형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학생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아있는 연인, 개를 데리고 나온 노인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오늘따라 내 눈에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슬프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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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

여름 서는 날 그리고 어린이의 날 창문을 활짝 열었어 여름 냄새가 난다고 어젯밤 산책길에 네가 말했는데 그 여름이 오늘 여기에 와 있구나 사과나무 그림을 그려야지 일어나자마자 다짐했는데 어머니 오신다는 소식에 그만 입을 삐죽거렸어 어머니와 닭도리탕을 먹고 어머니의 휜 엄지발가락을 염려하고 냉장고에 김치통 넣는 것을 도와드리고 이모님댁에 가신다기에 배웅해드렸어 갑자기 여름 비가 쏟아지네 점점 더 세개 내리네 빗줄기가 참 두껍다 이야기하고는 계단참의 책 젖을까 들여놓았어 빨래는 다행히 일찍 걷었고 창문을 꼭 닫을까 하다가 빗소리 더 듣고싶어 조금 열어두었어 코를 훌쩍이는 내게 감기약 먹을래 하고 물어봐주는 네가 고마웠어 오늘은 일찍 자야겠네 비가 내일 아침까지 내렸으면 너무 화창한 날이 아니었으면 내일은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으면 너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이제는 혼자있는 것처럼 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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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子正 자정自淨

자정작용 여름호를 위한 한 달 글쓰기가 끝났다. 주말과 공휴일 빼고 꼬박 열 아홉 편의 글을 지었다. 이제 단편을 지을 차례. 지난 호 글쓰기에 비하면, 빈 노트를 바라볼 때의 두려움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자정 子正까지 글쓰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면, 퍽 성공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자정 自淨'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실패였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매일 쓴다'라는 자기 위안에, 글을 어느 정도 분량에 맞추어 끝내는 요령만 늘었지, 좋은 문장이나 좋은 글을 쓰려는 노력에는 게으르지 않았나 반성한다.

그날 하루를 살며, 살아있는, 반짝이는 경험을 글에 녹여내는 훈련이 더 필요하다. 쓰는 것뿐만이 아니라 읽을 때 자연스럽고 힘 있는 그런 문장을 쓰는 훈련이 필요하다. 누군가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근력운동에 비유한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참으로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아주 담담하고 아주 솔직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글의 문체는 그 사람의 얼굴과 같아서 그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문체에 담겨 표현되기 마련이다. 그림도 마찬가지이지만, 작품 이전에 어떻게 사는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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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목련 꽃이 피었다. 일 년 중 단 며칠 동안만 저 곱고 아름다운 순백의 속살을 볼 수 있다.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을 준비해서, 누구보다도 일찍 저 우아한 꽃을 선보이는 목련의 마음은 어떨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처음 힘을 모아 만들어낸 책, 자정작용을 인쇄소에서 처음 받아들었을 때의 뿌듯함과 비슷하지 않을까. 보드랍고 하얀 책 표지는 목련의 꽃잎을 닮았고. 온갖 더러움을 씻어줄 것만 같은 우아한 꽃향기는 책갈피마다 담긴 우리 자정작용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 느껴지는 순수함을 닮았다.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기분이 들게 하는 새하얀 것들을 안팎으로 볼 수 있는 요즘, 마음은 바쁘지만 즐겁다. 곧이어 피어날 다정한 목련잎처럼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맞이할 더욱 싱그러운 문장들이 더 많이 태어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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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람바 람

밤 산책길. 급하게 마주친 사람에게 걷어 채이듯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다. 황망히 바람이 지나온 길을 바라보아도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바람의 흔적으로서 그 자리에 서 있다. 멈추어 있음이란 그런 것. 정지해 있는 존재란, 오고 가는 것들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의 산증인이며 목격자이다. 증인은 말한다. ‘바람이 방금 내 왼뺨을 후려치고 지나갔소!’ 목격자는 말한다. ‘바람이 저 계단으로 올라와 난간을 뛰어 내려가는 것을 내가 보았소!’ 목격한 바를 증언하기 위한 존재는 피곤하다. 땅은 지축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회전하며, 하늘 아래 모든 존재는 그 어지럼증을 못 이겨 끊임없이 제 몸을 변화시킨다. 그것도 모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날아간다. 관망자는 그 모든 양태의 변이와 충돌과 운동을 지켜볼 뿐 스스로 바람이 되지는 못한다. 산책길에 멈춰 서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계속 멈춰 서 있어야 하는가, 계속 움직여야 하는가.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다른 모든 것들이 운동하고 있다면, 구태여 나까지 그 산란한 유동에 참여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바람이 불 때 그것을 목격하면 나도 바람이 되는 것은 아닌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미친 듯 돌진할 때, 멈추어 서 있으면 그들에게 나 역시 미친 듯 역행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도 잠시, 모처럼 산책 나온 길에 가만히 서 있기도 참 멋쩍은 일이다. 하며 하릴없이 발걸음을 아무 곳으로나 내디딘다. 인생의 중대한 깨달음은 이처럼 정신없이 내질러 가던 사람을 도중에 붙잡고 잠시 멈추게 하지만, 득도도 잠시, 그 ‘멋쩍은 기분’ 앞에서 또 겸연쩍어 어디론가 또 방향을 잡아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산책길에 얻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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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자정작용

머리가 지끈거린다. 빈 속에 커피를 두 잔이나 더 마셨고, 그런 위장에 맥주를 들이붓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하다. 보통은 한번 쯤 와서 재떨이를 새것으로 바꿔주곤 하는데, 오늘 바에서 일하는 여자 아이는 바쁜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거의 모든 테이블이 가득 차 있었다. 날씨가 추우니 죄다 카페로 기어들어온 모양이다. 바에는 잘 차려입은 웬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보통 바 에는 단골들이나 카페 직원들과 잘 아는 사람들이 앉곤 하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이 카페와 어울리지않는 검은 정장바지에 검은 구두, 흰 셔츠에 넥타이까지 메고 있었다. 그는 몇 시간 째 시켜 둔 와인 잔을 쓰다듬고 있었다. 여직원이 내 자리까지 오지 않는 건 아마도 저 손님 때문이리라. 바에서 일하는 K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K는 근처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다고 했다.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전해들었다. 아직 앳되 보이는 얼굴인데 자기 할 일 이외에는 좀처럼 손님들에게 말을 걸거나 함부러 웃어 보이지 않아서 더 인기가 많았다. 주문을 받거나 계산하는 것 이외의 시간에는 늘 뿌쉬킨같은 희곡 작품이나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의 시인이 쓴 책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K가 오로지 웃어보이는 대상은 친구도 사장님도 아닌, 내 반대편 끝에 앉아있는 저 외국인이다. 아마도 이곳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하는 줄 알았는데, K와 종종 러시아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러시아인 같기도 했다. 외국인은 거의 매일 카페에 와 있곤 했는데, 외국 잡지들이 있는 서가 쪽 자리만 고집했다. 나는 반대쪽 끝, 그러니까 바에서 가장 먼 구석자리를 점령했다. 지난 번에 카페 연말 파티때 술김에 그 외국인과 몇마디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서로 질문하는 것에만 익숙하고 대답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여기서 무엇 일을 한다는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은 디미트리였던 것 같기도 한데 역시 확실치 않다. 아무튼 오늘 K는 바쁘다. 나 역시 계산하거나 주문할 때 이외에는 K와 말을 나눠본 적이 없다. 한번은 계산할 때 내가 어디에 앉아있었는지 잘 모르는 것 같기에, ‘저기 안 쪽 끝자리..‘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내 눈을 쳐다보며 '알죠-.'라고 그녀가 말 한 적이 있다. 그게 내가 K와 나눈 유일한 대화였다. 그때 이후로 나는 K에게 상당한 친밀감을 느꼈다. 그래서 주로 그녀가 일하는 날에 카페를 찾았다. 벌써 자정이 가까워 오는데,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초저녁부터 나와 있었는데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바빠서 미뤄두기만 했던 생각들을 모처럼 풀어내 보려고 무거운 노트북까지 들고 나왔지만, 몇 문장 쓰지도 못하고 메모장에는 괜한 푸념이나 계획 같은 것만 적어놓았다. 글쓰기는 영 틀린 것 같아, 몇시간 전 부터 가져온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죽음과 시간에 관한 프랑스 철학자의 강의를 정리한 책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같은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한문장을 무심결에 읽고 다음 문장을 읽을때면 이전 문장이 파악이 되지 않아 다시 돌아가고, 한참 읽고 있다가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다시 처음부터 읽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어, 기필코 이 한 문단 만이라도 차근차근 읽고 곱씹어 본 다음에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한과의 관계, 포함할 수 없는 것과의 관계, 다른 것le Differént과의 관계로서의 시간의 지속…’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등장이었지만, 모두가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문을 열기 직전에 모든 대화와 음악이 멈췄다. 지하실에 가득차 있던 퀴퀴한 실내 공기가 그녀가 문을 너무 활짝 열어재끼는 바람에 일순간 시원하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K가 자주 트는 데이빗 보위의 음악이 흘러나오자 사람들은 다시 자신에게 익숙한 곳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내가 앉은 곳에서는 그녀의 뒷모습만 보여,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몰랐지만, 일제히 자신에게 향했던 시선 때문에 잠시 얼어붙은 듯 했다. 더 자리를 둘러볼 것도 없이 그녀는 문간의 빈 자리에 외투를 벗어놓고는 앉았다. 나는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이 다른 것과의 관계는 그렇지만 무관하지-않음non-indifferént이다. 여기서 통시diachronie는 '동일자-안의-타자 l'autre-dans-le-même라고 할 때 '안’ dans와 같다…’ 갑자기, “안되겠어.” 하고 내 앞쪽 자리에 앉아있던 여자가 건너편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 둘은 한참 전부터 그곳에 앉아있었는데 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해 있는 듯 했다.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계속해서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와는 함께 할 수 없어. 처음에 우리가 서로에게 호감을 보였던 것은, 서로가 서로를 가지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지금 너는 나를 가지려 하잖아. 나는 나만 가질 수 있어. 네가 날 가지려 하면 나는 나를 버릴 수밖에 없어.”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여자가 말을 하는 동안 그는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안경알에 여자들 사진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반사되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쳐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타자가 동일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기억할 수 없는 것에서 예견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공경. 시간은 이 동일자-안의-타자Autre-dans-le-Même이며…’ 조금 전에 박력있게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가 일어나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시선은 책에 고정시킨 채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시야에 작고 귀여운 단화를 신은 그녀의 발이 들어왔다. '내가 앉은 쪽 벽에 걸린 그림을 보려는 것이겠지.’ 아직은 다섯 걸음 쯤 떨어져 있는 그녀였다. 나는 다시 이 수수께끼같은 문단을 들여다본다. 다행히 손가락으로 읽고 있던 부분을 붙잡고 있어서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지는 않았지만, 다시 읽으나 처음 읽으나 의미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또한 동일자와 함께 있을 수 없는 타자, 공시적 synchrone일 수 없는 타자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타자에 의한 동일자의 불안정일 것이다…“ 그녀가 다시 한 걸음 나에게로 다가온다. 이제 한 문장만 더 읽으면 된다. 이 문장만 읽고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볼 것이다. …동일자는 결코 타자를 포괄할 수도, 에워쌀 수도 없다.’ 두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내게 묻는다. “과연 화성에서의 삶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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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깡 배

2016.1.8 / @moonassi

삼십분 남짓 햇볕에 세워둔 것 뿐인데 차 안의 공기는 뜨겁게 데워져 있었다. 중동 어느 공항에 내렸을 때 들이마셨던 공기처럼 후끈한데다가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왠지 방금 들이마신 공기 중에 자동차를 구성하는 온갖 독성 물질들이 뿜어낸 분자들이 섞여 있을 것만 같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켜놓아도 시끄럽기만 하고 소용이 없는 에어컨은 꺼버리고 창문을 내리고 달렸다. 비포장 도로 위에서는 차 바닥이 긁히기 십상인지라 마음껏 속력을 낼 수도 없었다. 기우뚱 거리며 달리는 차창 밖 어딘가에서 닭똥 냄새가 풍겨왔다. 이마에서는 계속해서 땀이 흘러 내렸다. 사차선 도로에 접어들기 전 산 모퉁이를 돌아 가는데 어디선가 물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아버지 산소가 있는 산에서부터 이어진 물줄기가 여기까지 이어진 듯 했다. 급할 것도 없으니 잠시 세우고 담배나 한대 태우고 가기로 했다.

비닐장판이 덧대어 있는 평상 근처에 잘 자란 버드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밭일하는 어르신들이 자주 들러 쉬어가는 곳인지, 평상 위의 장판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손으로 한 번 바닥을 쓸어 닦고 앉아 있자니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버드나뭇잎이 스치며 내는 소리가 상쾌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평상 앞쪽으로는 폭이 이삼미터 정도 밖에 안되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큰 비가 내렸던 터라 물줄기가 제법 힘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물길을 따라 여기 저기 큰 바위들이 놓여있었는데 돌틈으로 물이 떨어지고 회오리를 만들며 웅덩이를 만들어 놓아 아이들이 놀기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건너편 물가에 조그만한 아이가 혼자 앉아서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근처에 집이라고는 자그마한 수퍼 뿐이어서, 아마도 그집 아이가 아닐까 싶었다.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저만할 때 이곳에 데리고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퍼졌다.

물 속에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인지, 수영을 하려는 것인지, 아이는 좋은 장소를 물색하는 듯 분주하게 이 바위 저 바위 위를 건너 뛰며 돌아다녔다. 물 위에 귀를 가져다 대는가 싶더니 한쪽 눈을 찡긋 감고는 물길을 따라 팔을 뻗어 쉬이이- 하는 소리도 내었다. 무얼 하려는 것일까, 그저 잠시 머물다 일어서려고 했는데, 아이를 보고 있자니 행여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는 나의 그런 걱정을 비웃듯 재빠르고 능숙하게 바위 위를 뛰어다녔다. 그러다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이가 몰두해 있는 세계에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이 된 것만 같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얼굴의 모든 근육을 움직여 최대한 밝게 아이를 향해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거기에 있으면 안되는 사정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조금 전의 활기를 잃고 다시 강 건너편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더욱 미안한 기분이 들어 얼른 담배를 끄고, 이제 볼일은 다 봤다는 듯 큰 동작으로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차로 돌아갔다. 차 문을 열고 눈치를 살피니 아이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은 듯 보였다. 나 역시 그 장소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아이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쁜 일이고 뭐고 그냥 하루 쯤 이 근처에 머물며 홀로 쉬다 올라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괜히 휴대폰을 꺼내 별다른 용건도 없이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네 어머니, 방금 인사 드리고 내려오는 길이에요. 그러게요, 많이 덥네요… 아니에요, 잠깐 쉬었다가려고요. 예, 늦지 않게 올라가야죠…”

강 건너편으로 올라가 집으로 돌아가는가 싶던 아이가 강둑 위에서 뭔가를 조심스럽게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수수깡으로 만든 조그마한 배였다. 나는 배를 처음 물 위에 띄우는 그 성스러운 행사에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최대한 아이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작은 목소리로 계속 전화에 집중하는 척 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안 오면 올 시간이 없으니까… 다음에는 같이 와요… 아니요, 잘 정리되어 있더라고요. 어르신들이 먼저 다녀가셨나봐요…”

아이의 배는 푸른색의 돛을 달고 있었다. 바닥이 평평한데다가 가벼운 재질이라 물에 아주 잘 뜰 것 같았다. 파란색 골판지로 되어있는 돛은 앞쪽으로 살짝 부풀어 있어 금방이라도 물 위를 가르며 나아갈 것만 같았다. ‘아저씨도 어릴때 수수깡으로 배도 만들고 집고 만들어 봤단다’ 하며 나도 가서 배를 만져보고 싶었다. 정확히는 수수깡의 서걱거리는 질감과, 수수깡처럼 한없이 가볍고 말랑말랑한 그때의 마음을 함께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무겁고 퍼석퍼석한 나는 여기 강둑 위에서 지켜볼 수밖에. 드디어 아이가 조심스럽게 배를 들어올려 물 위로 가져간다.

“아녜요, 올라가면 또 해야할 일도 있고… 거긴 다음에 가 볼게요… 네, 네에… ”

아이도 나도 숨죽이는 순간. 배가 드디어 물 위에 떴다. 배는 순식간에 아이의 손을 빠져나가 첫번째 급류구간을 무사히 통과했다. 물길이 소용돌이치는 곳에서는 잠시 회전하며 바위에 부딪칠 것처럼 애간장을 태우더니, 아까 아이가 손을 뻗어보였던 방향으로 잽싸게 미끄러지며 순항해 나아갔다. 배는 순식간에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전화기를 끄는 것도 잊은 채 넋을 잃고 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나를 의식한듯 아이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무척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나를 향해 해맑은 웃음을 한 번 지어보여주더니, 재빨리 둑으로 올라가 배를 따라 뛰어갔다. 나는 그제서야 전화를 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비포장 도로를 빠져나와 속력을 내려는데 강둑 위를 신나게 달리던 아이가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서더니 탄식하며 슬픈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 아닌가. 배가 어딘가 걸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가라앉기라도 한 것일까. 아이가 내 차를 발견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속력을 줄일 수가 없었다. 비밀스러운 수수깡 배 진수식에 허락도 없이 참여해 그 순간을 함께 즐거워 했으면서도 배가 무사히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하지 않은 것이 못내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내 그 생각 뿐이었다.

배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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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2016.1.7 / @moonassi

저녁 여섯시 무렵이면 낮동안 동쪽 산너머에서 하루를 보낸 기러기들이 날아온다. 아침 여섯시엔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면, 꼬박 열두시간 동안 저 산너머 어딘가에서 맛있는 식사도 하고 볕도 쬐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단체로 귀가하는 것일게다. 기러기들이 시옷자 대형을 유지하며 많게는 백여 마리, 적게는 수십여마리가 함께 노을지는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다.

알려진대로 기러기들이 시옷자 대형을 유지하는 것은 선두의 기러기들이 뒤따라 오는 기러기들의 공기 저항을 최소화 시켜주어 최대한 멀리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날아가며 끼룩끼룩 시끄럽게 내는 소리는 선두의 기러기들을 응원하는 소리라고 한다. ‘응원의 목소리라니, 너무 인간적인 발상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인도 기러기는 무려 에베레스트 산을 넘어 8,900킬로미터를 비행하기도 한다고 하니, 과연 힘내라는 응원이 필요하다고 할만도 하다. 장거리 비행을 위해 오랜 세월 그러한 것들을 스스로 터득하고 전수해 온 기러기들이 참 영묘하게 느껴진다. 여기 파주의 기러기들도 이제 봄이 오면 다시 조금 포근해진 시베리아로 날아가 여름을 날 것이다. 그렇지만 왜? 매년 그렇게 얼어붙는 고향 땅을 떠나 따뜻한 곳으로 내려왔다가 왜 이곳에 더 머물지 않는지 갑자기 의아하게 느껴졌다. 제 고향 땅이 그리 춥다면 애써 멀리까지 내려와 먹을 것이 더 풍부해질 여름, 가을을 기다리지 않고, 또는 제 고향보다 포근한 겨울이 기다리는 이 땅에 정착하지 않고 미련없이 다시 귀향하는 것일까?

머리가 나빠서? 아니다. 기러기들은 그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저들에게 딱 필요한 만큼만 얻고 그 이상을 욕심내지 않기 때문일게다. 자유로운 성정의 그들에게 이해타산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적인 습성이 없는 것이 당연할게다. 자유롭지 않으면 그게 어찌 새일 수 있겠는가. 아니면 기억력이 나빠서? 그것도 아닐게다. 기러기들에게는 인간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뻗어가는 단순하기만 한 선형의 시간이 아닌, 아닌 환형의 시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엔 이곳에 왔다가, 여름엔 다시 그곳으로 가는 것일 뿐, 다음 다음 계절에 대해, 내년에 대해, 또는 내 후년을 미리 걱정하여 대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러기들이 매년 돌아오고 돌아가는 이유가 자유로운 습성이나, 환형의 시간개념 때문이 아니라면, 어쩌면 시베리아 땅에서만 먹을 수 있는 아주 맛있는 곡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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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빛

2015.1.5 / @moonassi

낯빛을 잃어버린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늘 같은 낯을 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도무지 낯빛을 알 수 없는 이 아이를 두려워했다. 칭찬을 해주어도 웃지 않고 혼을 내도 울지 않는 이 아이를 어른들은 부담스러워했다. 또래 아이들은 자신들과 같이 마음을 낯빛으로 표현하지 않는 아이를 두려워했다. 그를 졸졸 따라오던 개도 아이의 빛깔 없는 낯을 보고는 깨갱 하며 달아나버렸다.

그래서 아이는 주로 강가에 혼자 나가 시간을 보냈다. 물 위로 고개를 내미는 물고기들과 날아다니는 풀벌레들 만큼은 자신을 무서워하며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고기와 벌레들, 나무와 물과 하늘에는 낯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아이는 낯을 꾸미거나 낯을 가릴 필요가 없는 그 곳이 좋았다.

어느날 아이는 강가의 갈대숲 속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햇빛에 번쩍이는 그 밝은 빛을 따라 가보니 바닥에 얼굴 모양의 거울이 떨어져 있었다. 아이는 그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기분이 좋았지만, 자신의 낯빛에는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이는 그 거울을 가면처럼 쓰고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거울로 된 가면을 쓰고 집 밖을 나섰을 때 아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 마다 자신을 붙잡고 기분좋게 웃어보이는 것이다. 그것도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이다. 지나가던 개도 아이의 얼굴을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몇시간이고 슬픔 얘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또래의 아이들은 그를 왕처럼 따라다녔다. 하루 아침에 동네에서 제일 인기있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아이는 저녁에 돌아와 가면을 벗어보았다. 거울에 자신의 무표정한 얼굴이 비쳤다. 무슨 영문인가 하여 다시 거울을 쓰려고 보니, 반대쪽에도 거울이 있는 것 아닌가? 아이는 그제야 그날 벌어진 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쁨에 찬 사람들은 아이의 얼굴에서 자신과 같은 행복한 얼굴을 발견하고 더욱 기뻐했던 것이었고 슬픈 사람들은 아이의 얼굴에 비쳐보이는 자신의 비통한 얼굴을 보며 마음속 사정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보고싶어했던 얼굴을 보고는 좋아했던 것이다. 다 이 거울 가면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는 다시 강가에 가서 원래 그것이 있던 곳에 그것을 버렸다.

다음날 아침, 아이는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나가보니 온 동네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어제 아이가 쓰고나온 거울가면을 본 사람들이 죄다 거울을 깎아서 쓰고 나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이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아이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이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자신과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 된 것을 보고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얼굴이 예전처엄 웃거나 울지 않는 낯이 되어버렸음을 알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또다시 혼자가 된 얼굴없는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강가로 나갔다. 멀리서 동네를 바라보니, 태양 빛에 반사된 사람들 얼굴이 도처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얼굴이 필요 없는 자연 속에서 다시금 평화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바람이 불지않아 조용한 강물은 높아진 하늘을 파랗게 비추고 있었다. 아이는 가만히 고개를 내밀어 물 위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강물 위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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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만감, 이미 봄이다

“나는 1월이 되면 벌써 봄이 온 것만 같아.”

하고 그녀가 말했다.

“에이, 곧 또 추워질텐데 뭘.”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맞는 얘기가 아닌가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내 마음의 계절이 비로소 봄인가 싶으니 말이다. 그러한 환절의 몽롱한 기운과 봄의 간지러운 징후들이 내게 이미 찾아 와 있으니 말이다.

기운을 차린 태양이 매일매일 더 높은 궤도를 그으며 지나는 것처럼, 나역시 나만을 위해 나지막이 던지던 하루치의 기운을, 이제는 함께할 누군가를 위해 더 힘차게 쏘아올린다.

겨우내 바짝 얼어붙었던 땅이 슬며시 긴장을 놓고 말랑말랑 해지는 것처럼, 나역시 거추장스럽게 입고 있던 잘 맞지도 않는 옷가지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쓰고있던 망측한 가면 따위는 이제 벗어버렸다.

식물들이 지난 가을부터 내 준비한 겨울눈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터뜨리고마는 것처럼, 나역시 그간 애지중지 행여 다치지나 않을까 보살피던 나의 그림들을 더이상 비늘잎으로 감추어두지 못하고 세상에 하나 둘 피워 내보내고 있으니-, 분명코 내게 봄은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곧 다가올 여름을 준비해야 할게다.

온듯 만듯 뜨뜻미지근한 온기만 전해주고 가는 봄의 심드렁한 햇살이 아니라, 세상 미치지 못할 곳이 없을 만큼 멀리 온기를 전할 수 있을만한 든든한 햇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단단해진 뿌리로 담아두었던 우수와 퇴적되어있는 자양들을 모두 빨아들여 정수리까지 힘차게 올려 보낼 추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피어난 꽃들을 부끄러움 없이 활짝 열어두고 적극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수분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아-, 벌써 가을인가'하고 말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 겨울에는? 다시 찾아올 겨울에는 아주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긴 잠을 잘 것이다.

모든 것이 설레기만 하는 서른일곱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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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선생님

이것은 국민학생 때의 일이다. 라고 운을 띄워 설명할 수 있을만큼 기억력이 좋지는 않은 편이다. 어린시절을 배경으로 한 성장소설 같은 건 아마 나는 평생 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몇 몇 장면들은 화석처럼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어서, 마음 먹으면 아마 몇페이지고 소상하게 설명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이란 것들이 주로 누가 누구와 싸우던 장면들, 선생님께 혼나던 장면들, 좋아하던 여학생에 대한 느낌들, 개구진 친구들과의 일화 같은 것들이지만, 그 무엇 보다도 선명하게 기억 나고 또 자주 상기하게되는 장면이 하나 있다.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얇은 대나무살을 작은 알루미늄 대롱으로 잇고 그 사이를 종이로 오려붙여 무동력 종이 비행기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나는 공작 시간을 너무 좋아해서 아침부터 굉장히 들떠 있었다. 학교앞 문방구에서 무동력종이비행기 박스를 사들고 교문 앞을 들어서던 기분이 아직도 선명하다. 드디어 기다리던 수업시간, 나는 3분단 앞에서 두번 째 줄에 앉아 있었고 교탁 앞에서는 담임선생님이 비행기 만드는 법을 설명해주고 계셨다. 당시 내 짝궁이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아주 작은 키에 두꺼운 안경을 낀 친구였던 것 같다. 종이를 오리고 풀을 바르고 나무 살 위에 날개를 접어 붙이고, 다들 집중하느라 교실은 그날따라 조용했다. 내 짝꿍은 비행기 뒷 꽁무니의 세로 날개에 살을 고정시키는 걸 어려워 했고, 나에게 잘 안된다며 도움을 요청했던 것 같다. 나는 내 비행기를 누구보다도 빨리 잘 만들고 싶었기에, 아마 이렇게이렇게 하면되- 하며 대강 설명해주었던가보다. 눈치를 챈 선생님이 짝궁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아 꼬리날개 만드는 걸 도와주고 계셨는데, 그러다 나를 한번 흘겨보시더니, “…쟤가 널 도와줄 것 같니?” 하고 짝궁에게 속삭이듯 말하셨다. 아마 당시에는, ‘이기심'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도 잘 몰랐을 터인데, 그래도 뭔가 내가 '나쁜 아이'로 낙인찍힌 것이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을 받았었을게다. 사실 당시에는 종이비행기도 잘 만들고 또 잘 날려서 좋은 성적을 받았기에, 선생님의 그 말은 금새 잊혀진 듯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이십몇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몇 년에 한 번은 그 담임 선생님의 속삭임을 어느 순간 곱씹고 있는 나를 보게된다. 그리고 그일이 떠오를 때면 항상 나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마침 마음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 숨어있곤 했다. 문 뒤에 숨어 있다보면 그때 그 오학년 담임 선생님의 그 말이 어김없이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것이다. 물론 그때 그 말이 나를 내부에 감금키려는 성향을 갖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 것이다. 타인을 향해 내 마음을 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또 내가 문 뒤에 숨어서 지키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고 있는 요즈음, 나는 먼저 그 경계가 되는 문에 대해 생각하는데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내가 어떤 계기로 그 문의 존재를 알아냈고 또 나를 그 안에 가두게 되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문은, 남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일시적으로 드러내는 위선적인 친절과, 자유롭게 서로의 마음 속을 드나들며 그 마음을 쓰고 채울 수 있는 그런 천진한 마음 씀씀이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그 문을 찾게되면 나는 먼저 활짝 열어젖혀서 빛과 바람이 들게 할 것이다. 그리고 안에 있는 게 무엇이든 끄집어내어 탈탈 털고 닦아낼 것이다.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도록 문을 트고, 나도 남도 자유롭게 거기에 머물고 함께 지낼 넉넉한 공간을 마련할 것이다. 숨지 않고 볕 아래를 활보할 것이다. 그렇게하면 아마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던 그 오학년때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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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

거대한 칼이 있었다. 수십만년에 한 번씩 솟구쳐 힘을 발휘하는 거대한 칼날. 지표면 위로 삐죽삐죽 솟아나온 잡다한 것들을 잘라내 버리는 그런 무자비한 칼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칼로는 자르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가장 단단한 바위도 두부 자르듯 자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칼의 길이는 수십킬로미터에 달해, 공중을 가를 때마다 거대한 바위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하늘에서 났다고 한다. 칼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때로는 물이 되어 모든 것을 집어 삼키기도 하고 불이 되어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도 했다고도 한다. 그 칼이 도대체 언제 나타나는 지, 왜 작동하는 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인류의 역사 기록이라는 것이 고작 수천년에 그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고대 신화 속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대홍수 설화와 거대한 날개를 가진 존재자에 대한 비유들로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좀 더 직접적인 흔적으로는, 지표면을 위에 나 있는 무수히 많은 칼자국들이다. 인공위성을 통해 촬영한 지표면에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수천킬로미터에 이르는 선형의 자국들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그것은 수천미터 바닷속도 마찬가지이다. 고대인들은 이 칼날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고 관찰하기 위한 피라미드를 세웠고 칼날의 움직임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지하도시를 곳곳에 건설했다. 그 흔적들이 아직까지도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신이 자신의 얼굴 위를 기어 다니는 족속들이 간지럽고 귀찮아서 한번씩 이 칼을 휘두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칼을 면도面刀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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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

"사랑... 사랑은... 사랑은 취하는 거랑 비슷해. 너무 뻔한 얘기인가... 취하면 취할 수록 더 깊이... 깊은 독에 빠지는 거지. 그러니 너도 조심해! 아무랑 막 뽀뽀하고 다니면 큰일난다! 아무튼 일단 그 사랑독에 빠지게 되면 거기서 그냥 헤엄쳐서 밖으로 빠져나올 수는 없는거야. 둘 중 하나야. 지금 우리처럼 계속 취해 있거나.. 아니 우리 둘이 사랑에 빠져있다는 얘긴 아니고! 큭. 그게 아니면 그 술독을 팍! 하고 깨고 나오는 수밖에. 자아, 부수자아아!" 짠! 팍. 추룹. 크으으으! "...아무튼 계속 취해있다는 건, 그래 지금이랑 비슷해. 취한 상태에서는 깨어 있을때의 너가 너에게 손을 쓸 수가 없지. 네가 취해 있다는 자각을 스스로 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애초에 우리처럼 진정한 로맨티트라면 취하면서 취할까봐 걱정하지는 않지! 어이 야, 왜 잔이 아직 안비었냐." 쨔안! 틱. 스르릅. 크으! "취해 있다는 자각이 있을리가 없지. 너는 지금 취했니? 손 이렇게 이렇게 해봐. 기분이 이상하지 않냐? 헌데 사랑에 취해 있다가 갑자기 깨어날 때가 있어. 특히 우리같이 작업하는 사람들! 정신이 번쩍 드는거야! 꿈 속에서 꿈인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갑자기 몸서리치게 두려워지는 그런 거랑 비슷한거. 알지? 가위눌린다고 하잖아. 아니면 물 속에서 갑자기 바닥에 땅이 닿지 않을때,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때 느껴지는 공포. 그런 거랑 비슷한 두려움이 생길 때가 있어. 그런 마음이 들어도 계속! 계에속! 그 안에 빠져 있어야.. 취해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사랑 밖에서 널 기다리고 있던 너 자신이 너를 흔들어 깨워도 무시해야되는거야! 다만 끊임없이 취하라! 라는 시구절도 있잖아. 누가 한 말이더라... 말라르메던가 보들레르던가 아무튼, 그런거야. 취함을 멈춰선 안돼. 만취! 만취! 자, 한잔 하실까요?" 짠. 쨍. 쯔읍. 캬! "응? 사랑 밖에 있는 나가 누구냐고? 나가 누구냐면 글쎄, 원래의 나라고 하면 마치 태어날때부터 있었던 나로 오해 할 수 있으니 바꾸는게 좋겠군. 뭐가 좋을까. 내가 만든 나라고 해야할까. 그래 어쨌든 그래서 상대적으로 나라는 게 없는 사람들이 쉽게 사랑에 취할 수 있는 것이지. 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부터가 애초에 워낙 어려운 일인데다가, 내가 나와 함께한다는 건 생각보다 두려운 일이거든. 아무튼,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에잇, 뭐 한잔 해!" 짠. 툭. 쪽. 크읔! "그래 독! 사랑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다른 하나의 방법은그 사랑이라는 술독을 깨 부수는 건데 그 독이라는 게...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처음부터 빚어 만든.. 신성한 독이랄까. 아무튼 너허무도 소중한 무엇이기에 그것을 깨어버린다는건 정말 큰 마음 먹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둘 사이의 신성에 대한 모독인거지. 아마 그걸 깨부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정도라면, 그 신성함 따위는 이제 중요한 게 아닌 상태겠지만 말야... 두 사람 사이의 생물학적 사랑의 결실이 아기라고하면, 정신적으로 잉태하는 건 그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인지도 몰라... 사랑을 부순다는건 그래서 제 자식을 죽이는 것과 같다고 해야할까... 응? 뭐라고?..." "그래서 선배는 그렇게 계속 취해 있을건가요? 아니면 부수고 나가실 건가요?" "아아.. 으음.. 뭐어... 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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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流言

…나는정말자유를원해서여기까지오늘하루정말많은생각을했다가오는한해에는제발올해와같이함께하는삶속에서만큼은제발로내게찾아온사람들이렇게말도안되는것들에대하였더니만도못한나는도대체어찌해야한다고말했다가도가도끝이보이지않는것이어도괜찮을지난날들을돌이켜생각해보면서도저히말도안되는일인것도아닌데에다가갈수록점점이흩어지는것같은기분이드는것도쉽지않았을것이라고는생각할수가없었는지도모르는일이많았고도로투명하고맑은것들에대해서만큼좋은일도대체가나는미나아름다움에대해서그런말들을주고받은만큼의애정을가지고나자신의미래에대해정말로아무생각이없었던…

머릿속엔 끝없이 말이 흐른다. 말의 흐름 속에서 나는 헤어나올 수가 없다. 말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나의 머릿속을 점유한다. 날아든 말들은 흐르다가 떨어져 큰소리를 내고 한데 뒤섞여 회전하고 가라앉았다가 솟구친다. 저들 습관에 따라 단어와 단어를 이어붙여 말을 만들어내는 것 뿐. 그 말들이 나를 죽이거나 살리지는 못하므로 나는 그저 그것들이 나를 차지하도록, 흐르도록 놓아둔다. 어젯밤 꿈 속에서는 흐르지 않는 말들을 만났다. 말들은 조그마한 유리병 안에 갇혀 있었다. 흐르는 말처럼 불순하지 않은 깨끗하게 정제된 언어들. 어제 마신 정종처럼 맑고 투명한 색이었다. 나는 유리병을 힘차게 흔들어 밝은 빛에 비추어본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한편의 아름다운 문장들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말들을 다 기억할 수 없어 나는 얼른 마셔버리기로 한다. 한모금 들이킬 때마다 꿈으로부터 점차 밀려나가는 것을 느낀다. 나는 마지막 한모금의 말들은 적어도 간직하고싶어 마시지 않고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저편에 있는 것들을 이편으로 훔쳐가는 일은 도저히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 나는 단 하나의 문장도 기억해내지 못한 채 꿈에서 깨어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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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자신의 혀를 자른다. 혀가 잘려나갔을 때에 어떤 고통이 뒤따르는 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에, 남자는 그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몰라 잠시 이상한 표정만을 지어보였다. 설령 그 느낌을 안다고 해도 이제 짐승같은 몸부림과 울부짖음 이외에는 그 아픔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혀를 깨물면 죽는다는 얘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자르기 전에 생각해 내었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은 서해 어딘가의 갯벌. 이제 다 기울어가는 겨울 햇살 아래로 낮게 깔린 바다가 반짝거린다. 반짝이는 모든 것들의 수 만큼의 고통이 그의 입 안을 마비시킨다. 떨어져 나간 혀 역시 고통을 느끼고 있을까. 혀의 통각들은 경련을 일으키며 그에게 그 고통을 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겠지만, 자신의 고통을 알아줄 주인이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어 불가능함을 깨닫고는 체념한다. 어쩌면 혀의 고통은 주체로부터의 이탈로 인한 심리적인 무엇일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모른다. 혀의 고통을 상상하고 미안함을 느낄만큼의 여력이 없어 그는 그저 혀를 바라만 볼 뿐이다. 떨어져 나간 혀 조각이 진흙 속에서 붉게 빛나다가 이내 핏기를 잃고 거무튀튀한 흙색으로 변해간다. 죽으면 다 흙색이 되는구나- 하고 남자는 생각한다. 혀는 진흙 속에서 말이 없다. 작은 게 한마리가 눈치를 살피더니 혀조각 주변을 멤돌다가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게에게는 혀가 필요 없을테지. 마치 혀 끝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것처럼 고동소리에 맞춰 욱신욱신 입 전체가 아려왔다. 남자는 자신의 혀가 초래했던 끔찍한 일들에 비하면 자신의 고통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또한 자신의 혀가 초래할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영영 입밖으로 표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혈이 되지 않아 입 밖으로 질질 흘러내리는 피를 닦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다. 그는 태양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피범벅이 된 채로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눈이 부신데다가 입 안의 핏물을 어찌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머금고 있다보니 어찌보면 웃는 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더이상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혀의 고통에 비하면 한겨울 바다 바람이 전해오는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큰 고통에대한 숙연한 마음으로, 다른 감각기관들은 저 자신의 고통을 겸손하게 낮춘 듯 하다. 아니면, 이 예상치 못한 끔찍한 사태에 뇌가 놀라 혀 아래로의 감각들엔 신경쓸 겨를이 없는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아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혀가 잘려나갈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더랬다. 죽음이라는 것이 틀림없이 예상되면서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그것이 실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체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그는 이것을 예상했기도, 또 예상치 않았기도 했다고 말해야 정확한 얘기가 될 것이다. 남자의 정신이 자신의 예상을 관철시키고, 몸은 그에 굴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언젠가 몸이 정신에 반격을 가할 날도 있을 것이다. 그가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고 몸에 변명한다. 사람들은, ‘그래 그 사람, 자기 혀를 잘랐다지?’ 하며 내 용기있는 그의 행동을 칭찬해 줄 것이다. 혀로 저지른 잘못에 대해 혀로 용서를 구한다는 명쾌한 방식도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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